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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위한 용서인가"                                                                          

                                                                - 영화 '밀양(密陽)'을 보고 -

 

                                                                                            신강용(16, 카나다 온타리오 거주)

 

 

  생김새나 차림새가 빼어난 사람을 우리는 영화 배우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런 영화 배우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저 길 가에서 만나는 사람, 장터에서 보는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것 같아서 내용이 한결 더 가깝게 다가온다. 게다가 아들의 주검을 확인하는 대목을 자극적인 선정주의에 빠지지 않고 멀리서 차분하게 처리하는 등 감독의 감각과, 굴지의 영화제에서 주연 여우상을 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전도연의 연기가 영화의 품격을 높여준다. 마치 50년대의 명감독Federico Fellini와 Julietta Macina 콤비의 영화나,  Jurce Dacin과 Merina Mercury 콤비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의미심장한 끝 장면과 주제음악은 Michelangelo Antonioni의 Eclipse를 연상케 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신애가 아들의 유괴 살해범을 용서하러 갔다가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 받았다는 말을 듣고 분노와 충격으로 혼절하는 대목이다. 신애는 범인을 위해서 용서하러 갔던 것이 아니고 용서를 베푼다는 영적인 성취감, 즉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용서하러 갔었기 때문에 범인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반갑기는 커녕 기회를 빼앗긴 박탈감으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진정한 용서라는 것은 하느님을 통하지 않는,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연애를 하는 듯하다고 간증을 할 만큼 하느님을 가까이 받아드렸던 신애가 왜 하느님을 통한 용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용서를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신애의 믿음이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애가 용서를 하러 가겠다 하니까 온 교회가 법석을 떨며 성원한다. 그 중 한 신도는 '화이팅' 까지 외치며 壯道(?)를 축원한다. 용서를 했으면 됐지 구태여 생색을 내며 가서 할 필요가 있느냐고 용서의 참 뜻을 지적한 사람은 정작 하느님을 정말로 믿느냐는 신애의 다그침에 우물쭈물 말꼬리를 빼던 종철 뿐이었다. 철야기도, 가두선교 등 외형적 활동으로 쌓은 신앙이, 안 가면 허전해서 교회에 간다는 이른 바 발바닥 신자 종철의 직관에도 못 미친다. 신애는 그런 수준의 신도들로부터 그런 정도의 믿음을 전수 받았던 것이다.

 

밀양의 얘기를 신문에 썼던 어느 독자가 기독교인들에 대한 각성제라고 한 것도 우리들의 이런 모습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이런 수준의 신앙으로는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되 찾아준 믿음, 그토록 의지하였던 그 믿음이라는 것이 용서도 베풀 수 없는 무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신애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에 몸과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신앙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손바닥을 펴 하느님을 말하고 손 바닥을 뒤집어 용서를 말한다. 그리고 그 손 바닥을 들어 올려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 손 바닥을 마주쳐 손벽을 치며 감사한다. 이른바 신앙을 如返掌으로 여긴다.

 

금세기에 가장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 마더 데레사는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를 고뇌의 괴로움 속에서 지냈다. 시사 주간지 Time은 마더 데레사의 이 고뇌를 '기도보다 더 숭고한 고뇌'라 평하였다. 이정도의 고뇌는 못 한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손뼉을 치며 기쁨에 넘쳐 찬양을 하는, 그렇게 喜喜樂樂함에 그치고 말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신앙이 꼭 괴롭고 힘 든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종말론적 신앙'을 요구할 수도 없다. 미개인들이 오랜 가뭄에 시달린 나머지 기우제를 지내려 산에 오를 때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올 것으로 믿고 우장을 챙겨 가는 것, 이러한 맹목적이라 할만큼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며 훌륭한 신앙일 수 있다. 그렇지만 적지않은 기간의 신앙 생활을 해 온 우리가 이러한 미개인 수준의 신앙, 비를 내려 주시기나 바라고 내 마음의 위안이나 바라는 수준의 신앙에 만족하여 거기에 安住할 것인가? 비를 내려 주시고 마음의 위안을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 자체보다 선물에 더 집착하는 것은 세배돈을 주시는 할아버지보다 세배 돈에 더 집착하는 어린아이의 마음 가짐이다.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풀이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에는 어른이 되십시오.” (고린도 전서 14:2)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적 여정 중에 .어둔 밤'이라는 시련을 거쳐 우리의 신앙이 성숙된다고 하였다. 어둔 밤이란 마치 젖먹이가 굳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젖을 떼는(고린도 전서 3:2) 괴로움과 같은 시련이다. '어둔 밤'의 시련기에 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던 만족이 사라지고 믿음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는 등 신앙생활의 위기마저 느끼게 된다. 하느님은 이런 '어둔밤' 가운데 성령을 통해 은밀한 빛을 비추시어 구원과 행복에 대한 욕구는 하느님 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는 자각을 우리에게 심어주신다. 고린도 전서 10:13의 말씀처럼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시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가 겪었던 고뇌가 바로 이 '어둔밤'의 시련일 것이다.

믿음도 거짓말, 사랑도 거짓말이라 외치며 하느님으로부터 뛰쳐 나가 한 장로를 유혹하고, 자기를 위해 드리는 철야 기도회에 돌을 던지는 신애에게 그래도 하느님은 은밀한 빛을 비추어 신앙을 성숙시켜 주실까?

물론이다!

'어둔 밤'의 시련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으로 베풀어 지는 은총이다. 자동차 문 밖으로 밀쳐 쫓아내고 저녁 약속을 해 놓고는 애꿎은 장로를 유혹하느라 바람을 맞치며, 베푸는 호의를 번번히 뿌리쳐도 묵묵히 신애의 곁을 지키며 끔찍이 돌보는 종철을 통하여 하느님은 신애를 지켜 주신다. 하느님이 어떤 것을 거두어 가시는 것은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며 바야흐로 하느님은 신애에게 남편이나 자식보다 더 귀한 선물, 즉 믿음의 굳은 음식을 주시려 하는 것이다.

 

여자가 머리를 자르는 것은 새로운 삶의 출발을 뜻한다.

신애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그리고 머리를 자르는 신애 곁에 묵묵히 다시 다가온 종철이 거울을 들어 준다. 마치 돌아온 탕자를 반겨 맞는 아비의 모습으로...

 

영화의 끝에, 잘려 떨어져서 흩날리는 신애의 머리칼을 쫓던 카메라가 빈 쥬스병이 뒹굴고 풀포기 하나 나지 않는 마당 한구석을 비치는 햇빛에 오래 머물며 우리에게 그 뜻을 묻는다.

그 햇빛은, 山野를 제압하거나 망망 大海에 퍼붓는 그런 오만한 햇빛이 아니다. 옹색한 신애의 마당 한구석을 가만히 비추는 은밀한 빛, 신애의 '어둔 밤'을 비추는 하느님의 사랑의 빛이다. 아마도 이것이, 고을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 密陽을 구태어 英譯하여 Secret Sunshine이라고 영화의 副題로 삼은 감독의 뜻일 것이다.

한낱 지어낸 이야기에 지니지 않는 것을 놓고 견강부회(牽强附廻)식으로 꿈보다 좋은 해몽을 하였나?

 

아니다.

무심히 부는 바람소리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듣고, 길가의 포기에서도 부처님의 자비를 보는 것이 모름지기 신앙인으로서 가져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신강용(16) 동문

카나다 온타리오 거주

이메일: kang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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