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흘러서 그침없는 한강의 - 한줄기는 오늘도… (하)





 


이윽고 이날의 하일라이트인 음악의향연으로 들어 갔는데, 공연에 앞서서 있은 남가주선농합창단안방자단장(15) 인사 말은 글의 첫시작에 소개한대로


우리 합창단 설립은 안방자동문의 오랜 바램이고 노력의 결과였는데, 지난 2월에 드디어 창단이 되어 남녀동문 20여명이 당장에 모여서, 매주 화요일 저녁 LA 한인교회에서 윤병남지휘자의 맹훈(猛訓) 특훈(特訓)으로 이날의 공연이 펼쳐졌다.


 


여기서 잠간, 윤병남지휘자의 소개-


윤동문은 7회로서 서울공대전자과출신인데, 본인 말대로 서울공대 성악과 출신이라고 표현하는게 어울릴듯. 6.25 1949 입학경쟁률이 251일때의 특차전형으로 당시 전국 4대명문교(경기 경복 부중 서울)였던 서울사대부중에 입학, 여늬 동문들과 마찬가지로 6.25때는 부산으로 피란하여 부산임시본교 보수산가교사에서 수학하다가 1953 서울수복시 서울본교로 복교, 우리 모교의 자랑 밴드브에서 색스폰주자, 서울공대전자과 재학중엔 시향 전신인 해군교향악단에서 오보에주자로 활약하기도 했고, 공군정비장교로 근무중에 공군교향악단에서 독창자로 활약하기도 했고, 당시 바리톤 김학근교수에게 사사하는등.. 그이후의 자잘구레한 그의 음악과 관련된 소개는 모두 생략, 1966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 웨스팅하우스관련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영국성공회교회의 성가대지휘자로서 그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 1979년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핏츠버그에서 관련기술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면서 다시 한인중앙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활약. 정년퇴직과 함께 이곳 남가주 오랜지카운티로 이주, 현재에 이르렀는데연초에 어렵사리 남가주선농합창단 설립 목전에 두고 지휘자를 구해서 안달하는 안방자단장과 최영일동창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필자가 슬며시 윤병남 마에스트로(Maestro) 본인 모르게 이들 후배들에게 천거하였다. 실은 윤동문이 이미 3 한줄기회 회장의 중책을 지닌 형편에 새로 시작하는 고생바가지 선농합창단 지휘자로서 공개적으로 천거하기엔 너무 염치가 없어서였는데, 다행히 본인이 흔쾌히 수락하고, 직후부터 그의 맹훈(猛訓) 시작된 결과의 이날의 음악의 향연이었다.


 


첫번째 순서 남성2중창 향수’, 테너 윤병남(7) 안성주 (16) 청중을 매료하면서 공연장 공기가 달아지기 시작, 이어서 혼성2중창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소프래노 최정혜(16) 테너 김영일(8), 이윽고 대망의 남가주선농코랄연주가 윤병남(7)지휘자와 조구순 객원피아니스트 반주로 시작되었다.


우리 귀에 익고 고국으로의 향수를 자극하게 하는 개똥벌레’, ‘강건너 봄이 오듯’, ‘바위섬등에 잇달아서 동무생각 고향의 2절은 합창단과 청중 싱알롱으로 힘껏 불렀다. 앙콜곡은 뷰티플드리머 열광과 흥분속에 공연이 종료,.잇달아 초여름의 향연 마지막 순서, 흘러서 그침없는제창을 끝으로 이날의 모든 순서는 성공리에


임원들이 재빨리 무대쪽을 정리하여 이날의 참석자 84명이 기념촬영에 임하였다.


 


출구에서 배웅하는 필자에게 어느동문이 물었다 요다음 모임은 언젠가요?


 


(이완규 6, 한줄기회 기획간사, 미국남가주동창회 초대(1969-71)회장)